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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 출판

세번째 이야기, 아빠와 호두과자

 아빠는 1남 4녀의 2대 독자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와 고모 넷은 아빠를 거의 추앙하며 사셨다.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당신이 원하는 걸 다 하며 사셨지만 그 특권 만큼이나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돌아가실 때까지 가지고 사셨다. 


 가부장적이고 엄한 아빠였지만 음식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미식가셨다. 가을이 깊어가면 마당에 솥을 얹어서 물을 끓였는데 장작불이 다 타고 숯이 되면 석쇠에 돼지고기를 구워주셨다. 도구와 재료라고는 나무 도마와 굵은 소금,  칼 그리고 비계가 적당히 붙은 돼지고기가 전부였다. 야무지게 칼집을 내서 굵은 소금을 뿌려 숯에 구워주셨는데 내 평생 그렇게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다. 살보다는 비계가 맛있다는 것을 그때 터득했고, 아빠는 비계를 고소하고 쫀득하게 구워주셨다. 그래서 나는 웬만한 삼겹살 집이 성에 차지 않는다. 첫 입맛에서 숯향이 느껴져야 하고 육즙이 가득해야 하고, 구워진 비계의 질감을 따진다.

 


우리 집은 일년에 제사가 12-3번쯤 되었다. 

시집가서 아기 못낳는다고 쫒겨 온 고모할머니를 비롯해 첩을 두신 어느 친척할아버지쯤 되는 분의 첩 제사까지 지냈었다. 아빠는 제사가 돌아오면 명필로 늘 지방을 쓰시고 장흥정(우리 동네에선 제사 장 보는 일을 장흥정이라고 한다)을 하신다. 

제사가 아니더라도 닭은 통째로 사와 쉐프처럼 근육과 뼈의 결을 따라 잘 토막내서 닭도리탕을 할 수 있게 해주셨다. 

우리 형제들은 아빠가 닭이나 생선을 손질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잔심부름을 하곤 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결혼하고 현타옴^^) 엄마랑 싸우고 엄마가 집을 나간 날이었는데 이상하게 엄마의 부재가 느껴지기는커녕 꽤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음식을 해주셨고 다정하셨다. 엄마가 있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그리고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이 기억은 왜곡된 것일 수 있다. 아빠의 편애 속에 살았던 아무것도 몰랐던 막내딸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를 좋아하고 야채를 즐겨먹고 과일 배는 따로 있는 것처럼 과일을 밥처럼 먹는 나는 아빠 식성을 꼭 닮았다. 닮지 않은 건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우시고 말술을 드시는, 아빠의 음주 흡연습관 뿐이다.  아빠는 말년에 알코올성 치매를 앓으셨는데 약의 용량을 조절 하는 것을 힘들어하시면서도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시는 걸 바랬었다. 

아빠는 아시아에서 인권 수준이 최고로 높다는  이천의 <성안드레아 정신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다. 약의 용량을 높이면 살아있는 시체가 되고 약의 용량을 낮추면 사회성과 절제력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소실된 상태를 보여주시기 때문에, 폐쇄 병동에 입원 후  약의 적절한 용량을 맞춰보기로 했다. 

면회를 갔었던 어느 날 , 약의 용량이 조금 높았었던지 아빠는 심하게 차분하셨다. 면회실에서 준비해간 도시락을 꺼냈는데 말없이 손에 꽉 쥐고 있던 호두 과자 두 알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리고 겨우 입을 떼시며 말씀 하셨다.

"이거 먹어" 

사회성과 도덕성 등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소실된, 아가였던, 어찌 보면 본능만 남았을 아빠가 끝까지 잃지 않으려 했던 것은, 딸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설령 그것이 역시 아빠 바보 딸내미의 환상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렇게 믿으려 한다.